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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증명하는 미술: 2010년대의 청년예술가, 신생공간, 굿즈의 담론에 더함

매미의 공간 2020. 9. 19. 10:35

생존을 증명하는 미술 

-2010년대의 청년예술가, 신생공간, 굿즈의 담론에 더함-


오정은




 2010년대 근시 예술의 노오력

기울어진 도시의 미끄러움

청년 시대의 제도

굿즈가 유예한 것들

생존 증명의 아름다움



도판1. Sisyphus(1548-1549) by Titian, https://en.wikipedia.org/wiki/Sisyp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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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근시 예술의 노오력

어렸을 때 나는 누구나 4년제 대학을 가고, 졸업 후에 바로 회사에 취직하는 줄 알았다. 현실은 좋은 대학, 좋은 회사를 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으며, 노력으로도 부족해 어느 정도의 운도 필요했다. 대학에 가고 취업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이런 평범한 삶의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었다. 한예솔(가명), 「3년차 백수, 그리고」, 『2018 서울시 청년수당 스토리공모전 작품 모음집 청년수당이란 응원』, 서울특별시청년활동지원센터, 2019, p.26.

올 신춘문예 투고작을 휩쓴 단어는 가난이다. 성인문학부터 아동문학까지 전 장르에 걸쳐 어둡고 희망 없는 시대를 주목하고 묘사하는 작업이 활발했다. 소설 부문을 심사한 한 소설가는 “돈 없는 청년이 방을 구하러 다니거나 동창 집에 텐트 쳐놓고 같이 사는 등 가난한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다”면서 “요즘 세대의 현실 인식 중 가난이 가장 압도적인 화두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춘문예 투고소설 “청년 가난” 유난히 많았다」, 한국일보, 2016.12.13.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12131378879498

2010년대를 젊음으로, 그러나 어두운 낯빛으로 살아온 한국의 청년세대에게 다음의 2020년대가 오기까지 이제 약 백 일간의 시간만이 남았다. 미생의 불안, 복지의 대상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빈번하게 사회에 불렸던 이름. 연민(아프니까 청춘이다), 자폐(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초탈(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의 감성으로 자신이 시대 담론의 주역이 되는 양상을 목도했던 이들은 불확실성의 미래보다 현재의 미시적 삶을 즐기며(소확행) 살아왔다는 데에서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산 정상까지 바위를 굴려 올려놓으면 이내 바위가 바닥으로 도로 굴러떨어져 버리지만 언제까지고 그 일을 무한 반복 (노오력)해야 하는. 


이 시대를 청년이자 미술가로 살았던 한 축을 보자. 이들은 선배로부터 ‘대안’을 찾지 못하고 ‘신생’의 공간을 만들었다고 일컬어진다. 작업실 한편, 빈 점포, 지하실 선반이 이들의 자족을 도모하는 공간으로 채택되었다. 계획하거나 의식하지 못했지만, 서로의 움직임은 일련의 동질한 양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공간을 중점으로 형성된 느슨한 연대는 도시의 새로운 지형과 세대 상을 그리는 계기로 작동해 나갔다. 나열되는 공간의 이름, 그것의 운영과 행사를 주최했던 자들의 성명, 상황에 가담하고 이를 목격했던 자들의 언술은 SNS 사이에서 해시태그를 늘리고 리트윗되며 몸집을 키워나갔다.

오늘날 신생 공간들이 공유하는 명백한 특징이 한 가지 보일 것이다. 바로 SNS다. 내 몸 누울 곳 하나 찾기 힘든 서울에서 감당 가능한 가격의 공간을 찾다가 도착한, 운영자에게도 낯선 그곳까지 방문객이 찾아올 수 있는 것은 스마트폰마다 깔려있는 지도 앱의 인도 덕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방문객들이 찾아오기까지의 거의 모든 홍보 활동도 SNS 상에서 일어났으며, 일부 오프라인에서 일어난 경우를 제외하면, 전시에 관한 피드백도 SNS 상에서 일어났다. SNS야말로 신생 공간을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공통점이다. (…) 수많은 글이 끊임없이 올라가는 SNS 타임라인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것이 흘러간다는 점이다. 이는 SNS를 중심으로 한 신생 공간 담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언급되지만 고여 있는 곳이 없다. SNS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에게 신생 공간과 관련한 명백한 흐름이 포착되었지만 그것을 140자의 트윗이 아닌, 한편의 체계적인 글로 정제하는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백지홍, 「sns와 미술현장의 변화: 신생 공간을 중심으로」, 『미술과 담론』, 2019.01. http://www.artnd.net/index.php?mid=board_KKqe72&page=2&document_srl=890

2013년경 ‘세대 갈등’ 이슈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수면 위로 대두하며 전환의 서막을 열었고, 청년이라 불리기를 자처하는 이들이 연대하며 공동의 목소리로 발언하고 스스로의 존재감을 당당히 미술계에 각인시켰다. 또한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들의 무대가 되어 준 다양한 플랫폼들이 순간의 속도에 불을 지폈다. 자유롭고 즉각적인 ‘SNS’는 더 빨리, 더 많은 익명들을 네트워킹하며 터치와 클릭으로 공감의 덩어리를 단단히 부풀려 가는 무형의 플랫폼으로서 톡톡한 역할을 했다. 장승연, 「젊음의 섬광, 대안의 미술」, 『아트인컬처』, 2019.10, p.86.

신생공간의 빈약하고 느슨하지만 부푼 네트워크는 현실을 대체하는 SNS에서 스펙타클의 위력을 과시했다. 전시의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어 환원되는 신생공간의 경험치는 게임의 미션 기록처럼 SNS에 인증되고, 타임라인에 실시간 나열·비교되었다. 집단에서의 이 같은 문화경험은 타인과 자신을 차별화하고 명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제,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으로 치환된다. 만약 미술관이 동시대 타임라인을 제도권 안으로 채택한다면, 이 상징자본은 공공에 인가되어 공고해질 것이다. 문제는 예술의 자율성으로 그것을 정당화하지 못할 때 있다. 네트워크, 이념, 시장과 문화가 경합하는 혼탁한 수중에서 상급으로 건져 올린 것이 단지 예술이라는 이름의 인기상일 수는 없기에.


이쯤에서 잠시 시간을 돌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민중미술 15년 : 1981-1994》이 민중미술의 역동을 제도권에 안착하는 한편으로 이에 대한 성급한 장례를 치렀다고 비판받는 지점의 함의를 보자. 당시 이주헌의 글, 「민중미술의 문화사적 의미-민중미술 15년 전을 보고」를 부분 인용한다.

최근의 일부 문화 정책상의 유연성은 각종 법률이나 제도의 변화가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인맥 관계로 인한 반사 효과 측면이 크다. 주지하듯 청와대에도 이른바 ‘개혁 인사’들이 있다. 민중미술전을 가능한 한 저지 내지는 축소하려던 문화체육부 일부 관료들의 노력이 청와대의 입김으로 무력화된 것은 바로 그런 우리 문화 정책상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민중미술전의 성사 역시 민중미술 진영의 제도 미술권에 대한 성공적인 진입, 나아가 이념 지향적인 예술의 제도적 착근이라고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 이에 따라 전시는 가급적 ‘불만을 무마하는 차원에서’ 구성원들의 요구를 거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갔고 예의 연대기에 따른 평면적인 전시 구성이 이어졌다. 제대로 된 큐레이팅십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민중미술의 지난 세월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가 아직 이 진영의 내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도 이 같은 내부의 복잡 미묘한 기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주헌, 「민중미술의 문화사적 의미-민중미술 15년 전을 보고」, 『문학과사회』, Vol.7, 1994.5.


 

도판 2.《민중미술 15년: 1980-1984》전시 포스터


《민중미술 15년》에 대한 이주헌의 소회는 신생공간 담론 형성에 기여한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바벨》(2016)에 대해 제기되어 온 견해와 사뭇 흡사하며, 《굿-즈 2015》(2015)와 그것의 후예로 일변되는 미술장터에 관한 우려와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제도권에 너무 빠르게 포섭 내지 흡수되었다는 비판과 함께, 산재한 이슈가 예술적 담론으로 변환되고 승급되는 과정에서 내부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의심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술사에 잇따른 탈주한 책임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산재한 현장의 일화를 모아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제도의 산에 근시안적으로 옮겨놓기를 반복하는가? 

일찍이 많은 평자들에게 <서울바벨>전시는 시작부터 2015년 활발했던 신생공간의 담론을 매듭지을 것이라 예기된 바 있다. 하지만 전시는 대상을 호명하고, 호명된 대상을 범주화하여 묶는 작업부터 쉽지 않아 보였다. 기획자는 예술플랫폼이라고 조심스럽게 명명하며 아티스트런 스페이스와 전시플랫폼, 콜렉티브 등 다양한 공간과 집단을 묶는다. 하지만 공론장은 이미 예하의 플랫폼을 ‘청년 예술가’, ‘신생공간’ 담론으로 집약시켰다. 특정 현상을 개념으로 추상화하고, 이를 현실에 밀착시키는 과정 속에 자생공간, 새로운 예술공간 등의 호칭들이 경합하는 과정이 있었고, 플랫폼의 상이한 결성시기와 역사들을 소거한 채 ‘신생공간’이 채택되다시피 했다. 기표와 지시대상이 아귀를 맞추지 못하는 상황은, 그만큼 상이한 공간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냈던 과정이 타동적이고 성급했음을 시사한다. 남웅,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상호참조적 자조 너머 <서울바벨>(2016.1.19~4.5) 리뷰」 , 『2017 SeMA-하나 평론상 한국현대미술비평 집담회』, p.35,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서울 바벨》에서 총 17개의 신생공간이 이합집산한 장면은 개별 공간들이 현실의 중력에 붙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별 공간들은 그간 자체적으로 진행한 전시나 레지던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축적한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며 각각의 구간을 점유했지만, 정작 열거된 작업들은 공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일정한 범주로 묶이지 못한 채 다소 산란하게 뒤섞여 있다. 이는 단순히 신생 공간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해온 컨텐츠들 간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간 공통의 플랫폼이라는 착시 속에서 이들이 어찌됐든 동질적인 대상으로 간주됐으며, 그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각자가 잃어버린 접촉면을 암시하거나 노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권시우, 「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 『미술세계(50)』, 2016.11, p.92.

경계가 모호해진 현재 예술의 사회화된 여건을 인지한 신세대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듯하다. 《서울바벨》류의 전시가 예술계로부터의 승인을 행사함으로써 참가자들이 예술계에 입성하는 공생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술계를 의식하는 예술인이고 예술계의 법칙에 적응하려 한다면 동호회 활동과의 차이(우위)도 증명하는, 즉 미학을 가시화하는 책임도 스스로에게 있음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예술의 민주화라는 사회적 기능을 인식한다면 《서울바벨》류의 전시는 기성 미술관들에 의해 형식주의로 정리되기 때문에 신세대의 예술실천은 예술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 조율하는 기능으로부터 멀어질 공산이 크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신현진, 「<서울 바벨展> 미술관에 입성한 신생공간」, 『월간미술(374)』, 2016.3. .https://monthlyart.com/03-exhibition/exhibition-focus-sema-blue-2016-seoul-babel/

2016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서울바벨>이 있었다. 마치 신생공간 총정리 같은 느낌의 전시였다. 신생공간을 미술계 구성원으로 인정해주느냐 마느냐에 관한 갑론을박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시립에서 멋지게 데뷔전(?) 느낌의 전시를 치르면서 그들이 완전히 기성 미술 공간에 입성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생공간과 그에 연관된 작가들의 미래가 아주 밝아 보였는데, 지금 시간이 흘러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마지막 고별무대 같은 느낌에 가깝다. 그 이후로 이렇게 신생공간이라는 장이 끝나는 느낌에 이르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총총, 「2016년 결산 잡담」 , 『옐로우팬클럽』, 2017.1.22. http://yellowpenclub.com/collaborate/2016-final-talk/


외부의 현상을 제도권의 자리에 수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지리적 역학 관계야말로 정작 다루어졌어야 할 주요 쟁점이었으나 이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부재했던 것이다. 각각의 개별 군집들이 한 공간에 모인 경관으로 발생하는 미학적 의제는 무엇이며, 일종의 무장소적 박물관이 된 제도공간에서 내용과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고 있는지와 같은 의제들이 공석으로 남은 채 대립각만 세워진 측면은 <서울바벨>전을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할 명분을 준다. 문정현, 「서울의 우울: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작동하는 공동체」 , 『2017 SeMA-하나 평론상 한국현대미술비평 집담회』, 서울시립미술관, p.80.

《굿-즈》와 《더 스크랩》 같은 것들은 아트페어와 옥션, 갤러리 등 기존 유통구조에서 벗어나 다른 소비자와의 만남을 설계하려는 지향점 아래 출발했다. (…) 이러한 플랫폼적 성격의 전시들은 대부분 예술경영지원센터, 서울문화재단, 한국예술위원회 등의 보조금을 기반으로 기획되었다. 한정된 예산에서 시장-플랫폼 구성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상당한 비중이 실렸다. 이로 인해 국가가 미술계에게 ‘천박한 자립’을 요구하는, 왜곡된 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보조금 수혜자의 자리를 떨치고 예술적 자립을 증명해야 한다. 작가들은 공무원들이 좋아하는 장터에 투입된다. 전시는 아트페어에 가까워지고, 그 성공은 수익의 실현으로 판단된다. 정희영, 「냉정한 현실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불안한 재미들」 , 『기대감소의 시대와 근시 예술』, Yellow Hunting Dog, pp.75-76.

《스크랩》도 한3회 하니까 이제 사람들이 질려한다. 《PACK》은 어떤가? 기금을 받던 안 받던 간에 사업들의 동력 자체가 떨어진다. 냉정하게 작가들이 이 행사를 통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비판해봐야 한다. 장터기금에 행사의 스케일을 맞춰지고 비슷비슷한 작은 소품들만 등장하면서 공회전하고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우리가 뭐하자고 계속 똑같은걸 보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드는 부분은 비판해볼 여지가 있다.  「라운드테이블 : 기금을 듣다」 , 『미술세계(79)』, p.73, 2019.3. 한혜수 김정아, 백지홍, 심소미, 양지윤, 김윤익,심혜란, 김익현, 김주원, 이정민, 차지량, 릴릴, 서다솜이 참여한 라운드테이블에서 김주원의 발언 발췌.


▲ 도판3. 《서울 바벨》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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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도시의 미끄러움

본 글을 통해 청년의 신생공간과 제도 간에 얽힌 타래를 풀면서 이 일화의 배경이 된 서울의 풍경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듯, 한국미술에서 ‘도시’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포스트 민중미술이 재건한 민중미술의 전위 속에 리얼리즘의 어휘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청년작가였던 신세대 미술가들의 키치 함 속에 풀이되었는데 전자가 커뮤니티 아트와 저널리즘적 실천방식을 따랐다면 후자는 대중문화를 위시한 자유롭고 충동적인 포스트 모더니즘적 수사로 도시를 재현한 것이었다. 이들 각각에 있어 도시화는 과도성장의 표상으로 경계의 대상이거나, 후기산업사회에 부상한 관조적 대상으로 풀이되었다. 반면, 2000년대 말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일련의 새로운 공간은 창작자들이 생존을 자급하는 아티스트-런 스페이스나 플랫폼의 실재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도시는 운영자의 본전이자 생존을 향한 다음의 유동이 전제된 곳이지 특별히 정치적이거나 미학적으로 심미적인 공간은 아니다. 그러나 신생공간의 운영 및 참여에의 경험이 제도가 인가한 상징자본으로 변화된 순간부터 신생공간의 도시 화두는 정치적으로 다시 쓰이게 될 것이었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2016 SeMA Blue>는 연령 뿐 아니라 정신과 태도가 가장 젊은, “청년 중의 청년” 작가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이번 참여 작가로 선정된 소규모 미술 창작 공간의 기획자들과 작가들, 독립적 스몰 디자인 스튜디오들은 을지로, 창신동, 종로, 청량리, 이태원 등 서울 구도심 산업지대 혹은 사라져 가는 변두리 틈새 지역에서 개별적인, 또는 느슨한 공동체 작업을 수행하며 신기루 같은 “서울 바벨”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김홍희, 《2016 SeMA Blue 서울바벨》 전시도록 서문에서 발췌, 2016, 서울시립미술관.

이번 전시에 참여한 플랫폼은 (물리적 거점 공간이 존재하는 경우) 주로 종로, 을지로, 창신동 등 구도심과 구산업지역 혹은 미술대학이나 작가들의 스튜디오가 밀집해 있는 합정, 성산 등의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밖에도 2010년 이후에 많은 기획자와 작가들이 문래동, 영등포, 상봉동 등 오래되고 쇠락한 동네의 허름한 건물을 찾아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역들은 주로 도시 슬럼화의 여파로 작업실이나 전시 공간을 유지하기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유지비용이 든다는 장점과 주거나 생활환경이 열악한 곳이니 만큼 자본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신은진, 《2016 SeMA Blue 서울바벨》 전시도록 ‘기획의 글’에서 발췌, 2016, 서울시립미술관.

《서울바벨》 전시 서문에서 낚아지는 “사라져가는 변두리 틈새지역”, “쇠락한 동네의 허름한 건물”, “저렴한 유지비용”, “생활환경이 열악한 곳” 과 같은 표현은 초대 작가들의 작업을 견지하는 글이라기보다 그들이 운영·참여하고 있는 공간과 생활을 대하는 외부세계의 감상적 묘사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지역적 리서치가 이루어지거나 부동산 자본에 대한 작가군의 일관된 태도가 포착된 것도, 적어도 전시가 그것을 계획하거나 향유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왜 《서울바벨》은 청년의 몸에 낡은 도시의 얼굴을 이어 붙여야 했을까? 연로한 도시가 회춘하는 영검한 비법을 “청년 중의 청년” 작가들이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결성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말 그대로 ‘신생’의 공간들을 포함한 17개 콜렉티브 라인업은, 애당초 이들이 쌓아 올린 정체성의 내공이나 사회적 역학보다도 일군의 키워드에 귀납되는 몇 가지 사례적 취사가 필요했던 취지를 드러냄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언론에 보도되어 온 청년예술가의 활동은 젊음의 낭만에 대비되는 다른 무엇이 포착된다.


금요일 저녁 서울 성북동 언덕에 있는 한 허름한 연립주택 옥상. 푸르스름한 하늘에 주홍빛 노을이 퍼질 무렵 젊은이들이 하나 둘 옥상으로 모여들었다. (…) 젊음과 함께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뜻하는 속어)이 깊어간 이곳. 지난해 문을 연 대안 문화 공간 ‘초록옥상’이다. 이름처럼 바닥이 초록빛으로 칠해진 이 옥상에선 이날 ‘잉여전’이란 제목의 이벤트가 열렸다. 요즘 10~30대 젊은이들의 문화 코드로 떠오른 ‘잉여’를 주제로, 작업하다 남는 ‘잉여품’을 가져와 여는 전시였다. “옥상, 건물 잉여공간? 예술 잉태공간!”, 조선일보, 2014.7.2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22/2014072200091.html


여기에서 우리는, 당대 도시가 처했던 숙명을 보아야 할 것이다. 2000년대 후반, 문화를 원천으로 도시경쟁력을 상승시킨다는 창조도시 개념 기반의 도시개발이 각광받으면서, 지역성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었다. 2008년, 오세훈 서울시장(2006~2011년 역임)은 컬쳐노믹스 culturenomics를 바탕으로 한 ‘창의문화도시 마스터플랜(서울 컬처노믹스)’을 발표하고 ‘역사문화거리’, ‘관광문화거리’, ‘복합문화거리’, ‘녹지문화거리’로 서울을 구획하고 세계수준의 창의인구가 밀집하는 도시환경을 조성, 창의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산업을 육성할 계획을 밝혔다. 유휴시설을 활용하는 ‘예술공장(Art Factory)조성과 장르별 스튜디오 건립, 창작아케이드와 클러스터 조성 계획이 드러나면서 구 산업 지역이 주요한 문화 요충지로 떠올랐다.

‘도시 문화가 돈이 된다’는 발견은 순식간에 도시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쇠락한 도심을 되살리는 데 문화예술만한 재료가 없다는 인식은 세계적인 추세가 됐다. (…) 국내 도시들도 앞다퉈 문화도시를 표방하고 나섰다. 서울시는 올 들어 ‘컬쳐노믹스(Culturenomics)’의 비전과 전략을 내놓으며 도시의 부가가치 창출과 경쟁력 향상을 위해 문화를 원천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1세기에는 문화가 곧 경제고 경쟁력이며 세계 도시들은 이제 산업이 아니라 문화로 경쟁한다”며 “문화가 돈이 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창작 여건과 문화예술 시장, 공공의 지원이 어우러지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대구 도심 재창조] 방치된 담배창고서 예술의 싹 움튼다”, 매일신문, 2008.12.08. http://news.imaeil.com/NewestAll/2008121806373054314

문화예술로 도시경쟁력 강화를 지향하는 서울시는 컬쳐노믹스(culture+economics) 정책구현을 위해 유휴시설 활용을 통한 창의기반 조성사업인 ‘서울시 예술창작공간 조성’을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은 유휴공간청사, 공장 이적지, 상권이 쇠락한 지하상가 등 도시구조 변화로 인해 낙후된 지역에 창작공간을 조성하여 예술가에게는 창작권을, 지역민들에게는 문화향유 기회의 증대를, 낙후된 지역에는 문화적 재생을 일으킬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김희영, 「공적 영역에서 예술가의 역할: 금천예술공장 커뮤니티 아트 프로그램」 , 『2010 서울시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 ‘ 공적 영역에서 예술의 역할: 지역재생의 과제와 커뮤니티아트’ 자료집』, p.124, 2010,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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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2011년, 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패배로 임기 중 사퇴하고 소속정당이 다른 박원순 서울시장(2011~현재 재임)이 당선되면서 도시 의제는 ‘시민의 삶’과 ‘복지’의 시책을 덧입게 된다. 구겐하임 빌 바오, 따산즈 경제특구를 보기 삼아 ‘디자인된’ 수도로서의 지위를 향해 나아가던 서울은 시민과 소통하며 ‘함께 만들어 누리는’ 수도로 방향 선회되었다. 도심 재창조 사업으로 구획됐던 서울은 기존 도시개발사업의 안정적 관리라는 정책승계로, 이어 ‘뉴타운 재개발 수습방안’을 필두로 한 복구로 나아갔다. 박원순 시장이 재선에 성공한 2015년에는 ‘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며 ‘2025 서울시 도시재생 전략계획’이 전략적으로 추진되는 등 서울은 도시재생의 화두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자체와 연계해 시작한 문화역량평가, 문화를 통한 지역 재생사업,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사업과 시동을 같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 도판4. 2015년 서울시 주요업무계획(부분)


▲ 도판5. 2015년 국토교통부 업무계획 인포그래픽(부분)

http://www.molit.go.kr/2015plan/sub_infograph.jsp


도시재생에 깃든 감각을 예각화 해보면, 컬처노믹스가 지향했던 문화를 통한 경제적 성취감 외에도 근대화 과정 속에 역부상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향수-를 보게 된다. 사회학자 김홍중이 그의 글 「골목길 풍경과 노스탤지어」(2008)에서 역설했듯 도시화 과정에서 서서히 소멸한 뒤, 문화적 영역에서 표상으로 부활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의 풍경이다. “사라져가는 변두리 틈새지역”, “쇠락한 동네의 허름한 건물”, “저렴한 유지비용”, “생활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형용되는 이들 장소의 감각은 신자유주의의 가속과 팽창에 역행한 희소하고 환상적이며, 심미적이고 선한 것의 이미지로 부상한다. 이것은 푸코가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으로 상정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에 가깝다. 낯선 여행지, 어린이의 인디안 천막, 다락방, 손님이 찾아드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 예시가 된 헤테로토피아는 삶의 현장에서 파악되는 실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일상의 공간은 아니다. 여경환은 《자율진화도시 UIA 2017 서울세계건축대회 기념전》(2017) 도록에 수록한 글 「‘미래의 미술’이라는 환영 혹은 헤테로토피아」에서, “근대의 계발 계획에 대한 신화를 해체하고 이성의 통제와 한계를 벗어나는 또 다른 가능성들을 품은 공간이 우리 현실 속에 내재해 있음”을, 그리고 이것이 ‘장소의 바깥’이자 ‘우리를 부식시키고 주름지게 만드는 불균질한 공간’인 헤테로토피아의 발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같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같은 도록에 실린 김현섭의 글 「한국 도시 건축의 풍경: 어번 보이드에서 도시의 목가성으로」에서는 수명을 다한 정수장이 도시민의 공원으로 탈바꿈된 선유동 공원의 사례를 들어, “자연을 향한 원초적 노스탤지어와 목가성을 자극함과 동시에 도시 속 폐허에 대한 기억마저도 보듬는 뜻 깊은 곳”으로 명명하며 이 같은 감각의 형태를 도심의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형상화했다.


신생공간을 정의하는 술어는 이처럼 도시지형의 특수한 감각을 전유해 왔다. 문래동 철공소 골목, 을지로 세운상가와 인쇄골목, 청량리 재래시장 골목, 통인동 시장과 용산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신생공간은 익히 알려진 대로 앞 세대 대안공간과 별도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었을 뿐 아니라, 미학적으로 화이트큐브의 대척점에 있었고, 그것이 의도적이건 아니건, 도시재생의 추동에 곧 편입될 경사로에 놓여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언급이다. 백기영이 2010년 「창작스튜디오들에게 묻는다!」에서 예의주시한 것은 국내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외국작가들에게 관이 집착적으로 요구하는 지역 컨텍스트에 대한 부담이었고, 김장언이 2013년 「예술가의 위치: 공동체와 작가」에서 불편하게 생각한 것도 2000년대 이후 정부 주도로 진행된 공공미술 정책이 공동화된 구도시의 비워진 공간, 재래시장과 낙후된 주거지역, 도시 재개발 직전의 삶의 공간 등에 관한 관심이었으니 말이다. 


개발의 논리가 경제성장의 욕망으로 도시 공간을 구획했다면, 재생의 논리는 감각의 차원 아래 욕망을 한 층 은폐시켜 공간을 선별한다. 《서울바벨》에 참여한 <지금 여기>(김익현, 홍진훤이 2014년부터 시작한 공간, 현재 운영종료)의 운영자 김익현이 오프닝 자리에서 밝힌 소감-“어디론가 가다가 미끄러져 이 곳에 잠깐 도착했다”-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지금 여기의 도시가 맞는 타율의 운명을 담고 있다. 같은 해 11월,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한 연례행사 <제8회 서울시 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 ‘최소한의 창작조건, 예술가의 작업실’>에 초대된 <공간 사일삼>의 운영자 김윤익(김꽃)은 “서울 안에서 움푹 팬 저열한 환경에 자리잡은” 신생공간이 그 환경의 특성을 “그대로 노출”했다고 증언하며, “그러한 타의적인 분위기”로 표현한 일련의 태도가 “어떤 특수한 모양새”로의 이행을 추동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것은 조금 추상적 진술이었지만, 건축과 영상이론을 전공한 연구자 윤원화는 조금 더 날 세운 의견을 피력한다. 그는 자신의 책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과 『미술세계 좌담회』 등을 통해 도시의 폐허에 얽힌 정치적 소망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각각의 활자는 당대 공간이 처한 미묘한 기류를 짚는다. 그러나 기울어진 도시의 역학은 신생공간의 폐허를 소진하고 다음을 향한 움직임을 수행해가고 있었다. 


▲ 도판6. 《UIA 2017 서울세계건축대회 기념전 자율진화도시》

(2017.9.3-11.12 서울시립미술관)


일년을 되돌아보면 저희는 어디론가 가속하고 있었던 것 같고, 그리고 미끄러져서 이곳에 잠깐 도착했습니다. 김익현, 《SeMA Blue 서울 바벨》오프닝, 2016.1.19. https://www.youtube.com/watch?v=J-Vl4uvoEas


개별 공간들은 SNS를 기반으로 활동을 밀고 나가고 있었고, 서울 안에서 움푹 팬 저열한 환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의 특수함을 끌어안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대로 노출이 되는 상황에 가깝고 그러한 타의적인 분위기가 서로를 멀지 않게 느끼게 한 것 같다. 그러한 태도의 기반은 개별적으로 어떤 특수한 모양새를 만들고 있었고, 그 점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다양 다종의 질감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김윤익, 「공적지원 영역 밖 예술가의 자발적 움직임: 문래동 <공간 사일삼> 사례」 , 『2016 서울시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 ‘최소한의 창작조건, 예술가의 작업실’ 자료집』, 2016, 서울문화재단, pp.285-286.

박원순 시장 체제의 서울시가 청년 문제에 접근하는 특정한 시각이 있는데, 미술관 프로그램이 거기에 끌려간다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청년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도시 내 유휴 공간을 활용하고 예술가들의 자생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2015년부터 서울시의 정책적 목표로 미술관에 하달된 것이다. 그런데 《굿-즈》가 튀어나왔고(…) 《서울바벨》이 신생공간을 불러와서 펼쳐 보이는 방식도 결국은 비슷했다고 본다. 윤원화, 「20161025 좌담회」, 『미술세계』, 2016.11, p.73.

미술을 쇠락한 구도심에 개입시키는 것만으로 지역 재생, 문화 생산, 새로운 경제적 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너무 훌륭해서 쉽게 믿기 어렵다. 그것은 삶과 예술이 합일되어야 한다는 오랜 유토피아적 비전과도 부합하고, 문화 예술이 사회의 특별한 외부로서 유리되거나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컬처노믹스’ 또는 ‘창조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과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당시 상황에서 미술의 실제적 효용은 도시 내에서 용도를 잃고 방치된 빈 공간들을-그대로 내버려 두면 폐허가 되어 안 그래도 불확실한 미래의 전망을 좀먹을 잠재적 구멍들을-값싸고 보기 좋게 틀어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술은 불량 주택지에 그려진 벽화처럼 오로지 소망으로, 너무 많은 소망적 사고로 충전되어 갔다. 윤원화,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워크룸프레스, 2016, p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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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대의 제도

세대교체는 이미 이뤄졌다. 단지 청년 세대의 주역들이 그럴듯한 기회와 장소에서 소외돼 있을 따름. 고로, 2015년 새해의 과제는, 새로운 세대의 성취를 이어나가며, 그 성취를 비평적 관객 여러분-상봉동 문래동 황학동 통인동 구석으로 밀려난 청년들의 실험을 찾아 고생스런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2000~3000명의 열혈 관객-미술인들-과 함께 공유하고 세상에 널리 유포하는, 새로운 사회적 접면을 개척하는 일이 되겠다. 임근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관’을 요구한다: 좀비-모던의 위기 상황과 인식, 그리고 해법」, 홍익대학교 <청년관을 둘러싼 문제들, 기대감소시대의 예술행동> 강의록, 2015.1.24. http://chungwoo.egloos.com/4065727

일견 정확하고 합당해 보이는 위와 같은 진단과 주장은, 일군의 청년작가들이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이라는 임시 조직을 꾸려 활동을 해나가게 하기에는 충분했을지 모르나, 체제의 보편성을 간과한 분할적 운동이 지니기 마련인 한계와 맹점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다. (…) 작업환경의 불안정성과 열악함, 미술 제도의 부조리, 접근성 측면에서의 불평등과 빈곤은 결코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세대적으로 분할되지 않는다. 이유인즉 체제란 역사적 시간성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이전에, 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이처럼, ‘미술제도와 그로부터 소외된 청년’이라는 도식이 실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충분한 당위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 일반과 사회가 맺고 있는 관계와, 나아가 세계 일반이 그 구성원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보편적 성질을 간과한 데에서 기인 할 것이다. (…) 청년들이 효과적으로 필드에 진출할 수 있다면 미술계 내부의 근본적인 부조리가 사라질 것이라 가정하는 임근준의 생각을, 체제자체의 문제를 미술계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편협한 심미주의적 시각이라고 여길 순 없을까. 정강산, 「예술가들이여, 추상에서 규정으로 전화하라-핌피현상으로서의 청년관을 비판하며」, 『집단오찬』, 2015.4.16. https://jipdanochan.com/tag/%EC%A0%95%EA%B0%95%EC%82%B0


지난해 말 한 토론회 자리에서 의견을 제기해 촉발된 ‘청년관을 위한 예술 행동’은 청년 스스로가 ‘청년’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자신들의 목표와 행동 절차를 구체적으로 도모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의미 이전에 그것은 돌출된 행동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현상이 분명했다. 미술계 파장 안에서 스스로를 청년이라 부르고 행동이라 주장하며 앞으로 해나갈 일을 점친다는 점에서 그것은 현재로써는 작아도 앞으로 커질 선언이기도 했다. 현시원, 「국립현대미술관을 박차고 나온 젊은 예술가들」, 『프레시안』, 2015.7.31.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128511&ref=nav_search%25222015%25EB%2585%2584

우선 ‘청년관을 위한 행동’이 “청년 스스로 청년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었다는 본문의 표현이 다소 거북스러운 입장에서 나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형편없이 너덜너덜해져 버렸음을 떠올렸고, 그 행위의 근거지가 “서울 시내에 산재한 이제 막 시작하는 공간들”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비로소 ‘청년관’과 ‘신생공간’을 잇는 모종의 연결 고리가 만들어지는 장면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청년이라는 이름 붙이기에 대한 내 과민한 알레르기를 감안하더라도 후자의 연결 고리는 과연 타당한가? 2015년 10월, 30여 곳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신생공간 중 ‘청년관을 위한 행동’에 참여한 곳은 겨우 두어 곳에 불과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애당초 신생공간 운영자와 신생공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국립현대미술관-주류 제도/기관과의 주도권 싸움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 다시, 여기서 다음과 같은 행간의 숨은 의미가 드러난다. 2014년 미술계의 세대 담론 안에서 ‘청년’의 위치에 섰던 최초의 성분과 그 이후에 드러난 실제의 국면 사이에 이상한 유격이 발생하고 말았다는 것. 신생공간의 출현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에게, 심지어 그들 자신에게도 다소 엉뚱한 돌발상황이었던 것 아닐까? 윤율리, 「겨울이 오고 있다」, 『VISUAL(12)』, 2015.12.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연구소.

윤율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풀자면 이런 것이다. 청년 혹은 신생공간은 너무도 다양해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불릴 수 없으며, 원래부터 있었기에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을 향한 호명을 거부함으로써 청년 담론을 “잘 팔리는 상품”으로 소비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매너는 윤율리 자신이 원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어떤 점에서는 실로 음흉한 처리이기도 했다. (…) 《굿-즈》에서 도드라진 몇 작가는 이내 미술제도에 들어갔고, 윤율리는 이러저러한 세미나와 좌담회에 불려 다니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그가 거기서 했을 이야기는 대략 짐작이 가지만, 어쨌거나 그를 불러주는 곳은 항상 호명의 장소였다. 안대웅, 「신세대 담론의 작은 역사: 2013-2016」, 『아트신』, 2019.2.12. https://www.artscene.co.kr/1680

나는 휘발성에서 ‘헌신하지 말자’는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신생공간 운영자는 대체로 대안공간 세대처럼 공간운영과 기획에 몸과 마음을 헌신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불가능한 미래를 바라보며 서로를 착취하느니 곧 사라질 현재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휘발성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굿-즈》도 예술경영지원센터를 제외하면 기존 미술계와 독립된 영역에서 일부 청년 미술생산자끼리 재미있게 한 번 놀고 끝낸 행사였다. 홍태림, 「20161025 좌담회」, 『미술세계(50)』, 2016.11, p.67.

(…) 실제로 ‘판매’라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애초에 작업맥락을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에 두고 있거나, 작가로서의 생존 방식과 작품판매라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들이 있었다. 그 중에 ‘반지하’를 관리하던 돈선필, 박현정 작가는 서브컬처에서 널리 사용되던 ‘굿즈’라는 단어의 맥락을 가져와 작가 본인과 주변 동료들의 작업을 판매할 수 있는 작은 플랫폼을 실험해 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2014년 말 몇몇 신생 공간을 운영하는 작가들이 ‘g8ds’에서 실험하던 ‘굿즈’의 태도를 가지고 아트페어 형식의 큰 행사를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굿-즈>는 겨우 공간을 만들어 전시를 이어가던 작가들에게, 작가 활동의 지속성이라는 문제를 던졌다. 권순우, 「‘굿즈’라는 태도들」,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시각예술 분야 결과자료집』, 한국예술위원회, 2016. p.19. https://www.arko.or.kr/infra/pm1_05/m2_02/m3_04.do?mode=view&page=&cid=534489

《서울바벨》에 참여한 예술가의 신원은 관망자적 자기 발언을 통해 확증적으로, 제도의 위계문제를 숨기고 예술가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효과를 거둔 듯하다. 그런데 이는 앞서 있었던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2015)이나 <공장미술제 논란>(2014), <미술생산자모임 공개토론회>(2013)에서 드러나 보였던 제도비판의 동력과는 현저히 다른 것이다. 임근준이 『문화+서울』에 기고한 글, 「공회전의 한국현대미술계: 윤리의식의 부재와 을의 분노」(2014.3)에서 우려해 보이기도 했던 성난 청년의 얼굴과 그가 사회를 맡았던《청춘과 잉여》연계 좌담회 <안녕2014, 2015 안녕?>(2014.12.28 교역소)에서 들춰진 청년의 혁혁함은 돌연 사라진 것일까? 현시원 또한 『프레시안』에 투고한 「국립현대미술관을 박차고 나온 젊은 예술가들」(2015.7)을 통해서 청년의 선언을 주목하고 그것의 연속성을 기대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본 것은 어떤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일까? 청년의 모습은 청년 당사자의 발언으로 다시 부정당하고 편협한 세대론이라 비판받으며, 다시 청년에 의해, 그리고 또다시 다른 청년에 의해 거듭 지워지고 쓰이기를 반복해왔다. 그렇다면 청년의 정체는 각기 다른 타자에 의해 요청되고 오용되었던 것인가? 혹은, 청년이란 동명의 이름에 얽힌 별개 및 유동의 흐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일까? 


이 같은 전제와 의심이 맞는다면, 요동했던 청년 정체성의 원인을 장 내부와 외부 중 어디에 무게를 두는 것이 보다 옳은 출발일까? 지금까지 밝혀진 문제의식에 대하여, 문화 다양성과 다원성으로 회귀해 개별의 문제의식을 소급적용해 버리지 않도록, 심지어 동시대 미술비평 생산의 순간포착에 연유한 의례적 한계로 쉬쉬하고 지나치지 않도록, 상황에 심도 있게 개입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본 글은 ‘청년 예술가’의 행적을 짚어 그를 해부하려 한다. 다만 사례의 폭을 한정할 필요가 있었기에 《굿-즈》와 그 이후의 플랫폼으로 대표되는 몇 가지 사건이 특정화되었음을 한계로 밝히고, 때로 시대 역순으로 주제를 경유해 보려 한다. 그리고 이에 앞서 지금의 청년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이들이 성장한 문화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 도판7.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2013년 지하철 광고

http://news.kawf.kr/?searchVol=8&subPage=02&searchCate=03&page=1&idx=122


주로 80년대생인 청년의 유년은 냉전체제의 붕괴, 해금의 자유와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성장을 만끽한 90년대 대중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부모세대가 이룬 ‘한강의 기적’ 의 산물은 사회 교과서 표지에 등장하며 선진과 자긍의 보기 사례를 제시했고, 신세대 열정과 사랑을 다룬 TV 성장드라마, 미니시리즈, 청춘시트콤, 인기가요가 미래의 표상으로 그려지고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찾아온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실추하는 부모세대의 지위, 기성질서의 붕괴를 직면하는 것이었다. 가장의 실직(명퇴)은 가정해체로 이어졌고, 불안과 우울은(왕따, 찐따, 가출 청소년) PC방과 네이트온, 프리챌, 싸이월드로 위안되며 인터넷 기반의 커뮤니티 문화에 축적되었다. 내신과 수능, 특기적성의 성적을 관리하며 대입을 치른 이들은(0교시, 야자, 이해찬 세대), 대학(인서울, 지잡대)에 입학하고 사회초년생으로 성장하며 시대의 암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듭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2010년 유럽발 경제위기는 헤어나올 수 없는 고난으로 사회를 강타했다. 가속된 시장의 양극화와 정권교체의 불안한 명암(대통령 탄핵소추)은 혼란을 가중했다. 치솟은 등록금(반값 등록금 논란)과 학과 통폐합 위기, 생활난(지옥고) 속에 열악한 고용환경(열정페이, 비정규직, 계약직)의 임시직 노동(알바, 편돌이, 편순이)을 전전하며 급증한 청년실업률로 좁아진 취업문을 두드렸다. 아이폰의 등장과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SNS가 인터넷 문화를 달구며 시대 감각을 덧칠했다. 청년은 스팩쌓기 경쟁 속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고 해서 삼포세대라는 이름으로(초식남, 절식남, 비혼, 혐혼), 이후 포기의 가지수를 늘려가면서 N포세대로 불렸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개인 인권이 새롭게 부각되었는가 하면(미투운동), 세대론(꼰대)과 계급론(흙수저, 금수저), 혐오감정의 만연이 확인되었다(헬조선, 김치녀, 된장녀, 한남충, 일베충, 여혐, 남혐, 진지충, 마녀사냥).


한편, 카이스트와 한예종 학생의 잇따른 자살과 생활고에 시달린 청년예술가의 병사 같은 이슈가 2011년 사회 지면을 불명예로 장식하면서 청년의 위기, 예술인의 복지 문제가 사회의 위중한 문제로 드러남에 따라 2012년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된 이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운영되기 시작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2013년 <예술대학 취업진로지원 모델개발연구>를 하고, 이듬해 <청년예술가 일자리 프로젝트>와 <청년예술가 일자리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이, 서울문화재단에 <서울청년예술단> 및 <최초예술지원사업>, <청년예술공간지원사업>이 신규편성되는 등 청년예술가 영역이 분류되었다. 인천문화재단도 2016년부터 <신진예술가 발굴지원 바로 그 지원사업>을 통해, 경기문화재단이 2017년, 2018년 <경기북부 청년 문화창업 지원사업> 등을 통해 청년예술가 지원사업을 신규 편성·운영했다. 2019년부터 경기문화재단은 <경기도청년예술인자립준비금 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이는 2016년 서울시 <청년수당>, 성남시 <청년배당>을 시작으로 중앙정부의 <청년구직활동지원금>를 비롯해 지방정부에 확장된 청년 개인의 현금지원, 기본소득 내지 출발자산 정책의 개념의 <경기도 청년기본소득> 사업이 예술인 복지사업과 결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의 청년·청년예술가 지원사업은 별도의 부록 지면을 두어 기입하겠다.

2013년 출범한 박근혜정부는 4대 국정과제중 하나로 ‘문화융성’ 을 공표했다. 그러나 문화융성위원회의 출범과 일련의 문화예술정책 사업은 비선실세의 축약편으로 드러난 데다 ‘창조경제’의 미명 하에 예술가 실존이 경제에 종속됨에 따라, <e나라 도움> 같은 국가보조금사업의 정산 및 활동내역 증빙 과정에서 직업적 열패감을 자습하는 폐해를 낳았다. 그런데 대안공간과 신생공간의, 포스트 민중미술과 굿즈 미술 간의 양립이 다름 아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슈업된 현상임을 복기한다면, 진보와 청년 간의, 그리고 예술가 집단 상호 간에 드리웠던 이항의 행적을 두고 드는 의혹도 간과할 수 없다. 더욱이 김장언의 글 「… 혹은 나쁘거나」(2018)에서의 주장처럼, 국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자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술계에 이상하리만큼 퍼져있던 무관심 혹은 관망의 정서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제기된 의문은 반경제적 집단에 절명의 위기를 피력하고 도덕성을 호소하는 한편으로, 생존의 방위로 하여금 예술의 상업화 논리가 설득된 증후를 배경으로 하며, 예술이 장내 싸움으로 설전하는 동안 정치·경제의 지휘/감독 아래 점증적으로 망실한 예술 본연의 가치 환기를 기대해보는 일이다. 이 실험에는 생존의 당사자이자 시대 담론의 주역인 청년 예술가가 자평하는 호명의 비주체성, 단명의 집단성, 유예적 관계 설정으로부터 간취되는 에토스(ethos)가 증인으로 출석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주창된 에토스는 도덕적 관습의 근거로, 막스 베버는 이것을 내부로부터 어떤 행동 양식을 유발하는 실천적 능력으로 보았다. 이를 김홍중의 저서 『마음의 사회학』(2009)에 등장한 개념으로 이어 가자면, 마음과 마음가짐을 형성하는 사회적 실정성의 특정 배치인 마음의 레짐(regime of the heart)을 패배와 소외로부터의 구제가 절박한 청년에게 집합적으로 드러난 특정성에서 확보할 수 있다.


이제 글은 청년 시대의 전말을 덮고, 몇 가지 사건에 내재한 집합 심리를 조회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21세기 한국의 청년세대는, 생존에 대한 불안이라는 기조 감정과 서바이벌을 향한 과열된 욕망, 그리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자신 존재의 가능성들을 전략적으로 계발하려는 집요한 계산으로 특징지어지는 독특한, 마음의 역동을 보여준다. 행위와 실천을 이끌어내는, 이 세대에 고유한 삶의 형식들을 생산하는 이런 행위능력의 원천이 바로, 우리가 생존주의라고 명명하는, 이 집합심리다. 생존주의는,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인지되고 체험되는 경쟁상황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수월성을 증명함으로써, 패배와 그 결과 주어지는 사회적 배제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믿는 마음, 마음/가짐, 그리고 마음의 레짐을 가리킨다.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49)』, 한국사회학회, 2015,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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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가 유예한 것들


▲ 도판8. 《굿-즈》 포스터


2015년,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작가 미술장터 개설 지원>사업 중 신진작가 미술지원 부문에 지원해 4천만 원 기금에 선정된 일련의 작가군은 ‘미술시장에서 소외된 실험적인 작품을 수용해 현대미술의 다양한 방법론과 형태를 제시한다’는 포부를 드러낸다. 그해 10월 세종문화화관에서 진행된 《굿-즈》에 대한 말이다. 15개의 공간과 6명의 작가 및 기획자가 주축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총 80여 명의 작가가 250여 종, 1,500여 점의 미술작품 및 작업의 파생물을 선보인 《굿-즈》는 5일간 6,000명의 관람객이 방문, 총 매출 1억 3천만 원에 도달하며 미술계 관심을 끌었다. 흥미롭게도 이 행사를 기획한 주체자들의 진술이 미묘하게 다른데 김윤익과의 인터뷰(2019.9.26)에 의하면, 일부 작가와 그 지인 중심의 공간으로 다수 관객에게는 일종의 폐쇄회로가 되는 <공간 사일삼>과 같은 동류 공간의 한계를 넘는 실험이 《굿-즈》를 통해 진행된 것으로, 그는 문화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개방성을 기해 많은 관객을 만난 것을 당시 요했던 동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윤율리는 미술장터의 기금을 빌렸지만 아트페어가 아니라 작업의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고 《굿-즈》의 의도를 주장해왔다. 그에게 화이트 큐브에 걸리는 정형을 벗어난 작업의 발굴과 유통은 동시대 전시형식의 고민거리였다. 강정석과 권순우는 돈선필과 박현정이 운영한 공간 <반지하>에서 굿즈(g8ds)라 부르며 인터넷과 연동한 작은 상점으로 기능했던 선반을 《굿-즈》의 시초로 진술한다. 여러 증언에 의해 사실상 《굿-즈》의 발기인이라 볼 수 있는 이들이 표명한 의도는 《굿-즈》의 공식 홈페이지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획의도와 가장 닮은 내용, “현대미술가들이 모여 자유롭게 자신의 굿즈를 판매하는 것”이다. 작가들의 작업을 유통할 구조가 마땅치 않으니 유통 플랫폼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바는 지금의 미술시장 구조에 대한 결여와 비판의식이 담겨있다. 이들 각각에 의해 《굿-즈》는 장소성의 확장, 작업의 형태적 변주, 유통망 개설의 실험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의 단일한 목표로 모일 수 있으며 하나의 목적이 다른 것의 파생적이고 부수적인 결과로 엮이기도 하지만, 우선순위의 간극과 조금씩 결이 다른 태도는 일부 기획자 안에서, 그리고 다시 80여 명의 참가자 사이에서 예민하게 충돌했을 것이다. 이것은 필자와 윤율리와의 인터뷰(2019.10.24)에서 ‘앞으로 《굿-즈》는 더 없다’고 합의된 원인으로도 확인된다.

벼룩시장과 같은 분위기의 《굿-즈》에는 참여 작가들이 고민하여 제작한 ‘작품과 상품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상품(Goods)들이 전시되었다. 작가의 생존을 위한 시스템은 작동불능이고 믿을 만한 조언자도 없는 현실에서 작가들이 직접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줄타기를 시작했다. 각자가 제시한 해답은 다르지만,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담론이 오가는 풍요로운 전시가 되었다. 5일 간의 유쾌한 난장은 대한민국 현대미술판에서 느끼기 힘든 흥겨움이 넘치는 예외적 공간이 되었다. 약 6000명의 방문객이 《굿-즈》를 찾았으며, 총매출이 1억 3000만원에 달해 웃으며 마무리되는 보기 드문 전시로 기록되었다.  백지홍, 「《굿-즈》에 엮는 몇 가지 생각들)」, 『미술세계』, 2015.11.http://www.mise1984.com/magazine?article=705

저희가 공간을 운영하면서 느꼈던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사실 그렇게 독립적으로, 자체적으로 하나의 어떤 폐쇄회로를 통해서 우리가 작업을 시도하고 실험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고, 지금도 즐겁지만, 이 즐거움을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2014년, 2015년부터는 좀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 그러니까 젊은 친구들이 자라나면서 느꼈던 어떤 문화적인 배경을 통해서 익숙하게 갖고 있는 분위기라는 게 더 많은 사람의 보편성에 가닿지 못했던 것이 대부분이고, 그렇다면 이들의 어떤 것을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형태를 변화하고 마치 닫힌 문을 여는 것처럼 개방하게 될 때 이들의 형태가 바뀌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됐어요. <굿-즈>는 사실 형태를 바꾸지 않고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이것 자체를 즐겁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서 만든 행사였어요. 저는 그 행사를 경험하면서 아, 우리 공간 사일삼 형태를 바꾸지 않고 기존의 화랑 시스템에서 많은 사람이 작업을 보러 오게 하는 방식에 가깝게 작업을 세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갖고 있는 문화, 그것 자체로 뭔가 사람들을 만나는 어떤 경험, 분위기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경험을 <굿-즈> 때 봤던 거죠. 필자와 김윤익과의 인터뷰, 2019.9.26.

올해 <굿-즈>를 기획했다. 사실 <굿-즈>는 어떻게 보면 작가 미술장터의 기금을 받았지만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장터를 만들려는 기획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트페어의 형식이긴 했지만 미술품을 잘 팔자는 의도보다는 작업의 다른 형태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 이런 기획이 작동하게 될 경우 우리는 전시라는 형식 자체를 더 동시대적인 방향에서 작가들과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참여했던 작가 혹은 기획자들이 소위 말하는 신생미술공간을 운영하면서, 화이트큐브가 아닌 곳에 작업물을 넣기 위해 굉장히 많은 다른 형태의 작업물을 파생시켜야만 하는 전시 차원에서의 고민 때문이었다. 작업물들이 판매까지 연결되고 그것을 다 늘어놓고 관객들을 집결시키는 방식으로 어떤 큰 이벤트를 일어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던 것 같다. 윤율리, 「특집좌담_2015 작가미술장터 I 대안적 아트마켓으로서의 ‘작가미술장터’, 그것을 묻다」, 『예술경영(335)』, 2015.12.10.http://www.gokams.or.kr/webzine/wNew/column/column_view.asp?idx=1637&page=1&c_idx=83&searchString=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무리하여 직접 공간을 만들었지만, 같은 방식으로는 언제까지나 지속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신생 공간의 운영방식은 순환구조 없이 일방향으로 쏟아 넣기만 하기에, 언젠가는 체력이나 자본, 또는 의지가 소진될 것이다. 따라서 작업 활동을 또 다른 작업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작가로서 경제 활동의 가능성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기존의 미술시장이 얼마나 활발히 작동할지 알 수 없고, 자신의 작업을 바로 판매할 길이 보이지 않기에, 또 다른 길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이때 판매하기 용이하다는 것은 바꿔 말해 구입하기 용이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구입하기 용이하다는 것은 운반하고 소장하기 편리한 정도의 크기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대의 상품이라고 볼 수 있다. 권순우, 「‘굿즈’라는 태도들」,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시각예술 분야 결과자료집』, 한국예술위원회, 2016. p.20. https://www.arko.or.kr/infra/pm1_05/m2_02/m3_04.do?mode=view&page=&cid=534489

굿즈(g8ds)에서 고무됐던 지점이 있어요. 그런 작은 매대로 누군가가 와서 작품을 샀다는 것. 구매자가 거주하는 지역에선 작품을 구경하거나 살 기회가 적은데, 편하게 홈페이지를 통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어요. 또, 남들 눈치 볼 필요 없이 가격이 다 나와 있어서 좋았다고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걸 사러 와줬다는 점에서 어쩌면 뭔가 작동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봤어요. 추후 돈선필씨가 일종의 발기인으로 굿-즈를 해자고 제안했죠. 나서주니 함께 하게 된 것 같아요. 강정석, 「대화: 굿-즈(GOODS) 2주기(週期)」, 『피아방과후』, 2018.7.17. https://pia-after.com/?p=609


▲ 도판9. 예술경영지원센터 2015년 <작가미술장터 개설 지원>사업 모집공고

http://www.gokams.or.kr/01_news/notice_view.aspx?Idx=1353


▲ 도판10. 예술경영지원센터 2015년 <작가미술장터 개설 지원>사업 신진작가 미술장터 선정작

http://www.gokams.or.kr/visualArts/vams.aspx


《굿-즈》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떨까? 서로 다른 기획의도로 형성된 행사였던 만큼, 이에 대한 비평의 축도 다양한 지점에서 목격된다. 신혜영은《굿-즈》의 사전텍스트 「지속가능한 구조를 위한 작은 움직임」(2015)을 통해 “생산자인 작가가 주체적으로 판매전략을 짜고 판을 만들어 경험”해보는 것이 “‘기대감소의 시대’에서 역량 자체를 키우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고무적”이라고 보았고, 기금을 후원한 예술경영지원센터는 2회 행사를 제안할 만큼 장터로서의 상업적 가능성을 보았으며, 참여작가 윤향로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작품 판매는 관객과의 가장 적극적인 소통이란 점에서 많은 작가들이 활기를 얻었다”고 언급, 백지홍은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매력”이라 비유한 뒤섞임의 에너지와 “기금의 효과적 활용 예시”로 긍정적 측면을 일컬었다. 반면, 《굿-즈》의 시장성은 자본주의의 양태로 우려되기도 했으며, 《굿-즈》에 참여한 김익현은 “이걸로 먹고 살 수는 절대 없다”는 “절망”을 보았다고 자평했다.

《굿-즈》가 하려는 일은 바로 이러한 생산물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굿즈goods는 강한 팬덤을 보유한 만화, 애니메이션, 대중음악 등 서브컬처에서 특정 작가나 작품과 관련해 제작, 판매되는 피규어, 인형, 포스터, 티셔츠, 게임, 각종 팬시용품 등의 파생상품을 지칭한다. 그 종류만큼이나 가격대도 다양한 굿즈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력 안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아이템들을 구입해 소장함으로써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본인들이 서브컬처 굿즈의 소비자이기도 한 이들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술 영역에서도 굿즈의 방식이 통할 수 있을지 타진해보고자 한다. (…) 개인적으로 특히《굿-즈》를 기대하는 이유는 작가들 스스로 행사를 주최하고 ‘굿-즈’라는 좀 더 유연한 형태의 생산물을 시도해본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차이는 사소해보이지만 사실 큰 차이가 될 수 있다. 기존 제도의 매개자들이 만들어놓은 판에 자신의 기존 작품을 내놓는 것과 달리, 생산자 본인들이 주체적으로 판매전략을 짜고 실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판을 만들어 경험해보는 것은 그야말로 ‘기대감소의 시대’에 생산자로서의 역량 자체를 키우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수 십 명의 작가가 제작한 수 백 종류의 작품과 ‘굿-즈’를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강점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수줍게 고백하자면, 시작도 전에 나는 평소에 눈여겨 본 몇몇 작가들의 ‘굿-즈’를 흥분에 찬 마음으로 기대하고, 또 미처 예상치 못했던 사고 싶은 것들이 있을까봐 은행잔고를 걱정한다. 신혜영, 「지속가능한 구조를 위한 작은 움직임」, 《굿-즈》홈페이지 아카이브 글, 2015. http://goods2015.com/text_02.html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14’에 참여했던 윤향로 작가는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배열·조합한 그림을 네 가지 색지에 인쇄했다. 인사미술공간에서 열었던 개인전 ‘Blasted (Land)scape’ 시리즈를 20만원짜리 한정판으로 제작한 것이다. “카드 단말기도 준비했다(웃음)”는 윤씨는 “작품 판매는 관객과의 가장 적극적인 소통이란 점에서 많은 작가들이 활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갤러리 아니면 어때 장터서 미술의 ‘난장’)」, 『경향신문』,2015.10.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510192045545#csidx7f9062737569977aff50bd9634b326c  

《굿-즈》는 처음부터 참여 작가들의 기준에 관한 명확한 미학적 경계를 그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벼룩시장과 같은 형태의 전시가 나타났다. 때문에 《굿-즈》라는 명칭에 예상하게 되는 동인전 느낌은 다소 흐려졌지만, 그만큼 관객들과 참여 작가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했으며, 이러한 뒤섞임이 《굿-즈》만이 가진 매력이 되었다. 자본주의라는 게임의 룰을 적용해본 《굿-즈》의 전시장에는 에너지가 넘쳤다. 작가들의 퍼포먼스가 이어졌으며 작품의 뒤에 있어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작가들과 만날 수 있었다. 직접 작품의 설명을 듣고 통장의 잔고를 생각하게 되는 경험은 작품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굿-즈》는 기금의 적절한 활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 《굿-즈》와 같은 전시는 소수의 작가를 지원할 비용으로 기획되지만, 그 파장은 작가 단위 지원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이러한 기획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하게 만들고, 당연히 기금이 적절히 사용되었는지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백지홍, 「《굿-즈》에 엮는 몇 가지 생각들)」, 『미술세계』, 2015.11. http://www.mise1984.com/magazine?article=705

저희는 어떤…절망 같은 걸 봤거든요. 왜냐면 《굿-즈》가 없어지고, 매일 《굿-즈》를 만들 수도 없는 데다가, 《굿-즈》기획 시작 단계에서는 ‘작품을 팔아서 먹고산다’는 것에 약간 희망이 있었다면, 하면서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걸로 먹고 살 수는 절대 없다고.  김익현, 「대화: 굿-즈(GOODS) 2주기(週期)」, 『피아방과후』, 2018.7.17. https://pia-after.com/?p=609


▲ 도판11. 미술시장 구조

『2016 미술시장 실태조사(2015년 기준)』, 예술경영지원센터, 2016. p.19.

http://www.gokams.or.kr/05_know/data_view.aspx?Idx=925


대안공간 시기의 정부나 민간 기업은 ‘전시공간 확대’에 주력했다면, 신생공간 시기에는 ‘작품판매’를 지원하는 기조를 보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작품과 상품을 동일시’하고 ‘예술가들의 복지증진을 위해서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장소만 조성해주면 된다’는 공무원의 행정적 마인드가 직접적 원인으로 보인다. (…) 신생공간이 자주 대안공간과 비교되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행동 양태는 yBa를 닮았다. yBa는 실험적인 면에서 ‘아방가르드’하지만, 자본에 충실한 미술의 현실을 드러낸 면에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소위 ‘아방가르드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명명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신생공간 세대는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yBa의 문법을 적용한 제스처가 곳곳에 보인다. 다시 말해, 그들도 예술적 실험정신을 향하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양태를 보였다는 의미이다. (…) 《서울 바벨》은 《굿-즈》이후 신생공간의 급격한 하강기에 열리면서 신생공간을 역사화하는 전시가 되었다. 신생공간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는 ‘신생공간’을 제도권에 오르기 위한 ‘사다리’, 즉 미들웨어(middleware, 중계 소프트웨어)로 생각했던 분위기가 분명히 감돌았다. 안진국, 「미래의 소진은 우리에게 과거까지도 남겨주지 않는다-신생공간, 아방가르드 자본주의 성좌」, 『기대감소의 시대와 근시예술』, 옐로우헌팅독, 2016, p.61, 63, 66.

기획팀은 《굿-즈》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해서는 안 되는 행사”이며 그 이유는 “선순환(갤러리를 통하는)이 아니기 때문”에 “공회전인 행사”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는 결국 ‘언리미티드에디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기획팀은 이 지점에 대해서도 단정적으로 《굿-즈》는 ‘언리미티드에디션’처럼 될 수 없다고 밝혔고 “현대미술이 아직 동인지나 아트북, 디자인만큼 소비층을 넓히지 못했으며 이 일을 작가들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스스로 대안이 되길 포기했고(애초에 될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긴 하다) 어떤 패배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혹은, 라운드테이블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획팀 개개인의 다른 욕망들로 비춰보았을 때 결국에는 제도권 진입을 희망하고 있고 《굿-즈》는 이를 위한 하나의 발판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뒤틀린 추측도 가능할 것 같다. 이쏨땀 「굿-즈, 2015년 하나의 사건에 대한 메모」, 『크리틱-칼』, 2015.12.20. http://www.critic-al.org/?p=368

《굿-즈》가 결국은 청년담론의 대표성을 획득한 몇몇 작가·기획자가 제도권에 오르는 발판으로 기능하고 만 것은 아니냐는 비판도 어렵지 않게 청취된다. 이는 앞서 인용한 안대웅의 글 「신세대 담론의 작은 역사: 2013-2016」(2019)과 안진국의 글 「미래의 소진은 우리에게 과거까지도 남겨주지 않는다-신생공간, 아방가르드 자본주의 성좌」(2016) , 이쏨땀의 『크리틱-칼』 기고글(2015)에서 일견 간파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견은 《굿-즈》에 가담한 자가 새로운 대안 만들기를 저버리고 청년 담론과 제도권의 덩치 키우기에 일조한 데에 대한 비판을 함의하며, 제도에 편입되었을 뿐 제도 자체에 아무런 변화도 기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이는 또, 선험적으로 ‘제도권=생존’의 도식을 주지하므로 예술가로 하여금 제도 밖의 생존을 불사하는 다소 가혹한 정조를 형언한다. 때문에 결국 글에 들어선 날 끝이 저자 자신에게도 향하는 모순과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여하튼 김홍석에 의하면 “생존주의의 레짐에서 진정한 생존자의 자리는 매우 희박하기 때문에, 사실상 다수의 분투하는 행위자들은 그 분투의 결과가 계속되는 좌절로 귀결될 때, 탈존의 방향으로 경사되어 갈 가능성이 높다”. 사라지는 것을 꿈꾸는 마음의 지향인 탈존은 포기와 피로, 상실과 비관의 마음이며, 범죄와 자살 같은 병리적 증상으로 외화된다. 그렇다면 《굿-즈》를 찬/반으로 평하기에 앞서 이 행사를 예술의 탈존으로 볼 수 있는가를 화두로 던져보자. “흥분”과 “활기”로 회자된 《굿-즈》의 잠재의식을 들여다보자는 말이다.


김홍중은「부서진 마음으로 사회학하기」(2016)에서 탈존에 대해, “생존의 꿈이 거부되고, 공존의 현실도 파괴되고, 심지어 독존의 환상도 환멸로 끝나버려서 부서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서술했다. 《굿-즈》를 추동했던, 그리고 행사의 시작과 동시에 종결을 알린 기획의 근간은 무엇인가? 장소성의 확장, 작업의 형태적 변주, 유통망 개설의 소망은 공간과 연대 지속의 환상이 부서진 상태에서의 실험이 아니었는가? 홍태림이 쓴 글 「신생공간, 휘발하지 않는 것」(2016.10)에 등장한 표현처럼 “앞 세대가 구축한 미술제도에 이따금 엑세스하는 열쇠” 획득의 열망, 김정수의 글 「좀비예술가와 벌거벗은 임금님」(2016)에 쓰인 비유 “좀비 예술가”, 이현 기자의 픽션 에세이 「존버의 일주일- 2019년 한국 젊은 미술가의 창작 분투기」(2019.6)에 쓰인 비유와 같은 “기금 킬러”의 속물성, 김용익이 《굿-즈》를 보고 메모한 세대 특이점—“우리 세대는 예술이 임노동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굿-즈세대는 예술이 임노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을 가진 청년예술가의 근거리에는 제도의 승인과 기금 당선, 예술로 먹고살기의 포부가 있을지 모르나, 그것의 근저에는 제도 탈환할 의욕에의 결여, 기성 시장 전망에 대한 부재, 예술과 삶의 조화를 체념해버린 현실 인식이 자리해 있다. 그러므로 탈존의 미술로서 《굿-즈》를 본다면, 후일 생존으로 변형된 자연적인 본능을 두고 비판으로 일반하기에는 모자란 부분이 생긴다. 신생공간의 주체자들이 특별히 “사라져가는 변두리 틈새지역”, “쇠락한 동네의 허름한 건물”, “저렴한 유지비용”, “생활환경이 열악한 곳”을 장소 선택의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공간의 감각으로 필연적으로 도출되었듯이, 《굿-즈》 역시도 기성 제도와의 분리를 선언한 적 없이 단지 타율에 의해 위치 지어졌을 가능성을 살펴야 할 것이다. 

일부 예술전공 학생들은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것을 당연시 받아들여 예술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거나, 제한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일자리 모색하여 부당한 처우를 그대로 수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에 대한 관심과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으며, 새로운 예술 콘텐츠와 인프라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여 취·창업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모델들은 청년예술가들에게 동기와 도전정신을 부여함과 동시에 유용한 정보 제공을 통해서 현 정부에서 강조하는 ‘창조경제’의 주역으로서 청년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김선애, 강주희,「청년예술가 일자리 실태에 대한 메타분석을 통한 지원 방안 연구)」, 『한국예술연구(11)』,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구예술연구소, p.186. 

그렇게 되면 “창조경제의 주역” “사다리”, “엑세스”에 응해 마치 ‘변절자’로 자리매김된 청년에 씌워진 오해와 집단 내부에 세워진 상호불신의 막이 걷어지는 대신, 애당초의 무기력과 체념을 심문할 수 있다. 이는 청년예술에 대해 지속적으로 쏟아졌던 비판을, 자원하지 않았으나 선출되었다는 식의 제스처로 변호해온 그의 에토스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호명한 부름의 출처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 수신자 목록마저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전제하는 토대를 인정/불인정함으로써 상부구조, 또는 그 대리인으로 숨은 체제 본질이 유지/와해할 수 있는 역할의 책임으로부터 무방비한 자유를 구사한 것은 아닌가냐는 질의에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김용익이 걱정한 “자본과 권력의 유혹과 겁박”으로부터 관계를 유예하여 흔적을 덮어버리는 실존의 유약함. 


추측건대, 답변은 포기될 것이다. 더해진 포기의 n만이 기대 감소의 시대에서 항구적인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물론 이 문장은 거짓이어야 한다.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고전적이면서 언제나 이미 급진적인 세대 갈등의 양상은 아방가르드의 친부 살해, 즉 전복의 의도를 가진 신참자가 반미학·반미술의 저항을 통해 기존의 미술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미술의 시작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에 비춰볼 때 지금 여기의 양상은 관계가 묘하게 꼬여있고, 제기하는 내용이 빈약하며, 요구사항은 보수적이거나 소시민적이다. 강수미, 「세대 미학, 미술주체의 문제」, 『월간미술』, 2015.2.http://monthlyart.com/05-article/column-%EA%B0%95%EC%88%98%EB%AF%B8%EC%9D%98-%EA%B3%B5%EB%A1%A0%EC%9E%A5-1/

1. 우리 세대는 예술을 위해 삶을 희생할 각오를 하는 모드가 있었으나 굿–즈 세대는 삶을 위해 예술을 희생하는 모드가 있다. 이때에 그들에게서 예술은 새롭게 정의된다. 예컨대 우리 세대는 예술이 임노동과는 거리를 두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굿–즈 세대는 예술이 임노동이어야한다고 생각한다.

2. 우리세대는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낭만적 꿈이 있었다면 굿–즈 세대는 혁명의 불가능성을 깨우치고 있는 현실적 삶이 있다. 말하자면 이들 세대는 예술작품을 통한 소통의 원천적 불가능성을 깨닫고 그것을 소비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3. 우리 세대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담론화하여 그것을 하나의 덫으로 앞에 놓고 작업을 해왔다면 굿–즈 세대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거대담론을 숨기고 있거나 스스로의 삶과 몸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세대라는 혐의를 씌우는 것이 가능하며 굿–즈 세대는 이런 점에서는 정직하나 자본과 권력의 유혹과 겁박 속에서 길 잃을 염려가 있다. 김용익 「#굿-즈 토론」, 『크리틱-칼』, 2015.10.28 http://www.critic-al.org/?p=321

이 현대판 보헤미안들은, 주류의 외부에 머무르는 것을 명예로 여기며 현실에 대한 증오와 언젠간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열에 들뜬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과거의 보헤미안이 그러했듯이 이들 역시 내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성공하기를 갈망한다. 이들은 그렇게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그물망으로 전개되는 토털 키치의 자기장 안에서 진정성과 스노비즘 사이를 왕복하는, 끊임없는 전자 운동을 한다. 이 같은 항상적인 분열증은, 이들 스스로 역설하듯, 이제 모두가 스노브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심보선, 「19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pp.64-65.

기대감소의 시대는 정작 그것에 순응하는 사람들에 의해 보다 강화된다. 기대수준 낮추기는 필연적으로 협소해진 시야와 근시적 인식, 생존형 행위양식으로 기우는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것들에 의해 기대감소의 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기대수준을 낮출수록 기대감소의 시대가 항구화될 개연성이 커지는 것이다. 기대 감소가 기대감소 시대의 조건들을 더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대 감소의 시대가 이야기의 전부여선 안 되는 이유이다. 심상용, 「기대감소의 시대는 근시 예술의 알리바이인가?」, 『기대감소의 시대와 근시예술』, 옐로우헌팅독, 2016, p.24.

미술사학자 폴 우드는 예술과 상품의 관계에 대한 글에서 예술가의 구실을 이런 질문으로 대신한다. “상품화로부터의 독립은 설령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해도 적어도 상상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가?” 상품에서 독립된 예술을 그 실제적인 불가능성에서 상상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이 상례와 예외를 예술로 직조해 구성해내는 예술가의 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현실 제도의 안과 밖을 교란시키며 유영한다. (…)

기획자의 구실에 대해서도 실제적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더라도 상상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존재를 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20~30세대와 관련된 독립적 생산자, 그리고 흔히 사용하는 독립 큐레이터라는 개념은 참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세대 명칭이라는 게 구성된 산물이고 허구적 조어일 수 있다는 허상을 직시한다면, 어디에서, 무엇이 독립했다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겠다. 실제적 관계에 대한 고려가 간과된 상상적 독립은 누가 던진 환상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근사해 보일 뿐인 수사가 아니라, 그 수사들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현주, 「젊은 예술가 세대의 조건」, 『시민과세계(21)』,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2012.6, pp.233-234,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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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증명의 아름다움


미술사회학자 자넷 울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생산의 실제적인 물질 조건은 예술가의 표현을 매개하며 문화적 생산물의 특별한 형식을 결정한다. 작가 중심으로 소소하게 운영된 신생공간은 그 폐쇄적 한계로 인해 플랫폼의 확장을 기하게 되었고, 커뮤니티 아트도 아닌 바 단지 지역과 장소의 정취를 강하게 벤 신생공간은 작품을 껴안기 위해 공간을 폐기하거나 디스플레이의 가능태를 고민하는 작용을 파생시켰다. 2015년 《굿-즈》 기획팀은 “앞으로 굿-즈는 없다”고 다 같이 합의했지만 제각각의 이유로 2017년 여름 <취미관>, 2016년 《더 스크랩》, 2016년 《퍼폼》, 2017년 《PACK》이 생겨났고, 소위 《굿-즈》의 후예로 불리면서 변이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중 《더 스크랩》, 《PACK》은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타의 공간을 대관하며 연례행사의 플랫폼으로서 작동하고 있고, 《퍼폼》은 한시적으로 운영했던 연희동 <퍼폼 플레이스>(김웅현이 2017년 자신의 작업실을 변형해 시작한 공간, 현재 운영종료로 알려짐)를 접고 마찬가지로 무형의 플랫폼으로 행사의 거점을 유동하고 있다. 《더 스크랩》은 사진을, 《퍼폼》은 퍼포먼스, 게임, 영상 같은 비물질 형태의 매체를 다루고 판매를 모색하는데, 그동안 수익의 측면에서는 실패라 자평한 《더 스크랩》이 2019년 롯데백화점 및 협동조합 사진공방 291과의 마찰을 겪으며 난항 중에 있고, 《퍼폼》과 《PACK》은 구매목록 리스트와 카운터, 스태프가 매뉴얼화되어 보다 상점에 가까워진 모습을 보였다. <취미관>의 《취미관》과 《PACK》은 선반 유리장과 투명 입방체(큐브)로써 작품이 진열되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굿즈 또는 작품이 진열에서 소장으로 이행되는 과정의 경험으로 하여금 소비자를 유혹한다. 《취미관》과 《PACK》이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는 마치 무균실의 케이스를 지향하는 것은 김윤익이 「대화: 굿-즈 2주기」에서 말한 바—“사람 냄새를 아예 없애고 싶었거든요.”—처럼 극단적인 인상마저 주는데, <굿-즈>를 통해 작업이나 문화가 기존 형태를 바꾸지 않고 제 모습 그대로를 다수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의 인터뷰(2019.9.26)를 환기하면, 관람환경이 바뀌더라도 유지되는 작품 플랫폼에 대한 기획자의 탐닉으로 익힌다. 같은 글에 실린 김홍식의 발언에서도 신생공간에 서술된 폐허의 이미지를 벗고 장소로부터 달아나려는 시도가 열거된다.

저희가 <정신과 시간의 방>을 했을 때, 처음에는 다 하얀색이었거든요. 심지어 바닥까지 흰색으로 칠했어요. 왜 그랬는지, 생각이 비슷해요. ‘공간이랑 싸우지 말자.’ 근데 그렇게 몇 개월 운영을 하니까 또, 그거랑 싸우고 있는 거예요. 네. 그 게 너무 힘이 든 거예요. 저희가 생각한 건 그거였어요. ‘우린 폐허 싫다. 화이트 큐브 하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냥 하얀 폐허가 된 거죠. 폐허인데 하얀색이니 더 이상한 거지. 김홍식, 「대화: 굿-즈(GOODS) 2주기(週期)」, 『피아방과후』, 2018.7.17. https://pia-after.com/?p=609

신혜영이 「스스로 ‘움직이는’ 미술가들 - 자립적 미술 신생공간 주체들의 생활 경험과 예술 실천 연구」에서 확인한 것처럼 정확한 집계가 어려울 만큼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빠른 신생공간이라, 《서울 바벨》에 참여한 곳 중 공간 대부분이 운영자 간의 잡음, 운영자금의 부족, 자연스러운 행보라는 저마다의 사유를 불분명하게 전한 채 문을 닫았고, <아카이브 봄>, <합정지구>, <RAT school of ART> 정도가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그 뒤로 <산수문화>, <소쇼>, <상업화랑>, <위켄드+2/W> 등의 신생공간이 새로이 진입해 마르지 않은 잉크로 이야기를 이어 쓰고 있다. 2019년 초 『미술세계』가 특집기사 「2019 콜렉티브 작동법」을 다루며 <반짝>, <와우산타이핑클럽>, <옐로우펜클럽> 같은 콜렉티브 사례를 소개했는데 이들은 청년예술의 활약이 무형의 시공성으로 확장된 사례를 표명한다. 텍스트 기반의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SNS의 인기가 사진과 영상 기반의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옮겨갔고, 새로운 청년상(90년대생이 온다)이 다시금 시대에 제시되는 만큼 비평의 거점과 형태의 이형 변화도 예상할 수 있겠다.


창조경제의 후풍 속에 콘텐츠와 접객되었던 예술의 복귀 향방에 물음표가 있는 와중에, 《언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독립출판과 아트마켓시장을 방문하는 청년 관객 수는 꾸준한 증가 폭으로 미술과 교류하고 있다. <작가미술장터 지원> 사업 또한 계속되어 《연희동 아트페어》, 《서대문여관아트페어》, 《ART369》, 《유니온아트페어》와 같은 미술시장 플랫폼의 실험이 지속되고 있다. 윤율리는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간한 『2018년 작가미술장터 개설 지원 사업』의 편집자로서 해당 사업에 존재하는 비평가 존재를 시사했다. 작품의 질적 수준과 행사, 유통의 선순환 구조를 통찰하는 기획을 호소하는 외침은 비단 하나의 사례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작가의 참여가 두드러졌지만 작품의 수준(완성도, 표현력, 내용 등)에서는 작가간 편차가 컸다. (…) 출품작 선정에서부터 판매 방향, 전시 구성에 이르기까지 한층 구체적이고 치밀한 기획이 필요하다. 변종필, 「아트레지던시 미술장터: 추억을 큐레이팅 하다)」, 윤율리, 「2018작가미술장터를 마치며」, 『2018년 작가미술장터 개설 지원 사업』, 2018. 예술경영지원센터. p.311에서 재인용.

서울의 작가미술장터가 다양한 예술가들이 연계해 있는 다양한 공간에서 주제·기획을 가지고 진화해 가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 미술생산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이슈, 그리고 이들이 미술을 매개하는 방식, 또 매개행위가 판매로 이어지는 유통의 순환구조를 진단하는 통찰력 있는 기획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기영, 「집기류: 함께 하는 것을 넘어서」, 『2018년 작가미술장터 개설 지원 사업』, 2018.예술경영지원센터. p.117.


▲ 도판12. UE11(서울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 11회) 전시 포스터, 유어마인드·서울시립미술관 공동주최

http://unlimited-edition.org/ue11

《언리미티드 에디션(서울아트북페어)10》(2018.10.20-21 북서울시립미술관)은 2만 1천여 명의 관객 수를 갱신했다.


우리는 앞서 《굿-즈》 기획에 얽힌 서로 다른 지향점과 《서울 바벨》 그리고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으로 표상되는 이종의 사건에 대한 상이한 청년의 데시벨을 들었다. 포스트 《굿-즈》로 분사된 회로는 정주하지 않고 있다. 식상한 발견일지 모르지만, 청년이라는 서사의 비대함에는 다방면으로 관계해 있는 실존 주체가 개입해있다. 그리고 그것은 탈존과 생존욕망을 넘나들며 배석된 위치의 당위와 해석으로부터 자주 비켜 나왔기에, 지금까지 떠밀려온 청년담론은 ‘어떻게’의 성찰로부터 여전히 결정이 유보되어 있다. 이는 어쩌면 김홍중의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윤리적 해체」(2009)에 담긴 생각처럼, “어떻게 사느냐”보다 “살아남는다는 사실”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다시 말해 “좋은 삶”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몰두하게 만든 신자유주의의 처사다. 그런 의미에서 2010년대의 예술은 그 노오력의 강도와 생존/죽음의 여부를 지나, ‘어떠한 예술이었는가’라는 질문을 이제는 던져야 할 때다.


시시포스가 옮겨다 놓은 바위는 산의 실존과 시시포스의 노동을 볼록화하는 도구다. 우리는 그것을 ‘형벌’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청년예술가가 그간 자립을 위해 증명해온 것은 ‘예술’인가, ‘형벌’인가? 다시, 미끄러져 굴러온 바위가 지금 여기의 청년에게 생존의 아름다움을 공모하고 있다. ●


 부록. 우리나라 청년지원사업


청년구직촉진수당_고용노동부 

청년구직활동지원금_고용노동부 

서울시청년수당_서울시 

청년뉴딜일자리_서울시 

경기도 청년기본소득_경기도

경기청년카드_경기도 

청년면접수당_경기도 

청년 복지포인트_경기도 

성남시 청년 배당_성남시 

성남시 청년기본소득_성남시

청년사회진출_인천시 

드림체크카드(인천 청년수당)_인천시 

창원시 청년구직수당_창원시 

대전시 청년취업희망카드_대전시

대구형 청년수당_대구시 

청년구직활동지원금_울산시

부산청년디딤돌카드_부산광역시 

광주청년드림_광주시

강원도 청년수당_강원도

청년구직지원수당_전라남도

청년구직활동수당_경상남도

청년 해외인턴_경상남도

경북청년복지카드_경상북도

청년커플 창업지원_경상북도

청년쉼표 프로젝트_전북 전주시

청년취업활동수당_전남 영광군

청년취업드림카드_전북 익산시

청년자기개발금 지원_제주도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최초예술지원_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_서울문화재단 

서울울 바꾸는 예술·청년편(Y)_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허브_서울문화재단 

서울청년예술단_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공간지원_서울문화재단 

경기북부 청년 문화창업 지원사업_경기문화재단 

경기도청년예술인자립준비금_경기문화재단 

신진예술가 발굴지원 바로 그 지원_인천문화재단 

청년문화활성화사업_부산문화재단

청년예술가창작활동지원_부산문화재단

울산청년문화프로젝트_울산문화재단

청년유망예술가육성지원_제주문화재단

청년예술창작공간임대료지원_제주문화재단

청년문화기획프로젝트지원_제주문화재단

제주대표 청년문화사절단_제주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