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신생공간의 이름으로

매미의 공간 2020. 9. 19. 10:33

신생공간의 이름으로


윤민화(전시기획)


1

새롭게 발생했거나 이미 있다가 갱신했거나 단지 새 간판만을 내걸었든 간에 2014년에 미술계는 여러 공간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긋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신생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던 공간들은 사실 재생에 더 가까웠지만, 적어도 그 공간들이 새롭게 판 소셜 미디어 계정 정도는 신생이었던 것 같다. 기존의 예술 제도에 대한 불응으로 비치지만 저항까지는 아닌, 그 어딘가에 위치한 신생공간이라는 사건은 지난했던 한국 미술계에 남다른 화력을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실천이 가장 먼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명명을 통해서였다. 


신생공간이라고 불리던 공간들의 예술적 실천을 드러내는 사건이 있고 난 뒤에 이 이름을 부여받았는지, 아니면 이름에 관한 언설이 그 발생을 구성했는지 헛갈리기도 한다. 돌이켜보건대, 어느 날 어떤 일이 일어남을 알리는 깃발이 하늘 높이 나부끼더랬다. 그 깃발에는 어떤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사람마다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설왕설래했다. 이윽고 사람들은 그 깃발에 쓰인 글씨는 다름 아닌 신생공간이더라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깃발을 들었던 누군가가 이 깃발의 글씨는 신생공간이라고 슬쩍 흘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것의 출현보다도 그 이름은 큰 시선을 끌었다. 이 명명하기는 공감대의 형성과 흥행의 차원에서는 성공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 성공 덕분에 파산을 맞이하게 된다.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의 충만(充滿)이 명명할 수 없음—명명 불가능함—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여러 공간의 서로 다른 과거의 서사와 결성 시기 등은 신생공간이라는 필터에 들어서면서 소거당하거나 스스로 거세했다.[각주:1] 결국, 신생공간이라는 주어에 관한 뒤늦은 반성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신생공간이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진 개별성을 서술하고, 그 차이와 사이를 늘어뜨리려는 시도보다는 서둘러 이 이름을 역사의 전당에 올려놓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서울 바벨》(2016.1.19~4.5)이 정확히 그러했다. 


우리가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을 어딘가에 써넣는다면, 지도만큼 적당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한때 우리가 신생공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지도 앱에서 지하철역으로부터 최단 거리와 시간을 가늠해 볼수록 그 효력은 공고해지곤 했었다. 가능한 한 멀고, 가파르고, 구불거리는 복잡한 길이어야 한다. 접근성보다는 이동 시간과 체력을 담보로 운영되던 신생공간에게 공간의 지리적 위치와 체감 거리는 그 이름값에 비례했다. 따라서 《서울 바벨》이 지도가 아닌 미술관에 신생공간을 차곡차곡 진열했을 때,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은 더는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지도 없이 이들을 호명했던 전시는 일군의 예술에는 파국적인 결과를 남겼다.


2

어쩌면 신생이라는 이름은 그저 강박의 산물이었는지 모르겠다. 대안에 관한 강박, 변별성을 향한 강박. 인큐베이터에서 자란 제도적 적자가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새것에 관한 갈증과 바람이 어쩌다 이 이름을 만나 잠시 매듭을 지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이 예술 실천을 향한 강박 또한 자본의 언어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청년이라는 세대론적 관점, 운영자이자 임차인인 주체들, 예술이라는 노동의 대가 나아가 작품의 제작과 판매 그리고 순환 논리로 이어지는 논의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순응하면서 증식해왔다. 그래서 이 신생이라는 이름표를 단 공간들이 한데 모여서 《굿-즈》(2015.10.14-10.18)를 열고 예술 상품의 판매를 도모했을 때, 모두 고개를 주억거리며 갈채를 보냈는지 모른다. 

 

“1980년대말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이후,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여러 시도들이 나타났다. 그중 독일 녹색당이 최초의 모델이 되는 환경론적 정치는 환경 문제에 대한 강박적 실천을 대안으로 제시했고, 실제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치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환경론의 자본주의적 전유였다. 자본주의는 환경 문제를 이윤 창출의 계기로 완전히 바꾸어냄으로써 환경론을 자신의 상품 전략으로 자기화한다. 마치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강박은 아무 것도 없다고 선언하듯이, 자본은 환경을 아주 훌륭하게 상품의 범주로 만들었다. 예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작품이 자본주의적인 순환 속에 포섭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반대 증거가 작품의 거래와 순환을 교란하는 예술적 시도들이다.”[각주:2] 


이렇게 오늘의 세계는 그저 강박의 세계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 강박에 힘입어 자가 증식한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늘날 예술을 비롯한 모든 다양성과 특수성에 해당하는 실천적 담론은 (그것이 무려 환경일지언정) 모두 자본주의에 매달려 상품 진열대 앞으로 호출되어왔다. 따라서 우리가 목격했던 2014년 이후의 어떤 예술적 실천은 그것이 신생(新生)하기 이전에 신생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그 명명하기를 둘러싼 예술적 강박은 그저 한국 미술계가 빚어낸 상품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3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라는 시장에 달라붙기 위한 작품의 상품화는 큐레이토리얼에 있어서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는 것으로 변이되었다. 어쩌면 이 지점이 애초에 신생공간이라는 필터에 의해 소거되었던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신생공간이라며 불리는 공간만을 쫓느라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목소리들의 개별성을 일찍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작품의 생산 방식과 유통에 관한 고민, 나아가 그 순환의 장을 스스로 만드는 데 기여한 ‘자기 조직화’라는 담론은 ‘포스트-큐레이토리얼(post-curatorial)’이라는 한국적 모델을 생산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굿-즈》를 시작으로, 《더 스크랩》, 《퍼폼》, 《취미관》 등과 같은 새로운 플랫폼들은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것의 주체들로서 조명되고 있는 큐레이토리얼 모델이다.


이들이 비판적으로 모델을 고안해온 2014년 이후 한국 미술계의 예술적 실천을 더는 신생공간이라는 해묵은 이름이 아니라 그들이 변형하고 실험하고자 하는 그 맥락으로서 조명되고 증식하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의 강박은 이 새로운 모델들마저 또 다른 이름으로 포섭하려고 할 것이며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굿-즈》는 1회로 완전히 막을 내렸고, 지난해까지 이어온 《더 스크랩》 또한 더는 열지 않을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현재의 기술과 미디어 환경에 대응하는 큐레이토리얼 전술은 또 다른 주체에 의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리라 기대한다. 그것이 도돌이표처럼 ‘포스트 신생공간’이라는 이름 아래 싹을 틔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것의 이름을 향한 강박과 명명하기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를!    



  1. 남웅,「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 상호참조적 자조 너머〈서울바벨〉(2016.1.19~4.5) 리뷰」『2017 SeMA-하나 평론상』, 2017, pp.35-37. [본문으로]
  2. 서용순, 자본주의와 강박의 증식, 서울시립미술관《강박²》전시연계 학술 심포지엄 자료집, 2019, p.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