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에서 전-후반전이 끝난 이후
경기장에서 전·후반전이 끝난 이후
콘노 유키(미술비평·전시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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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한 공간에서 공을 돌리고 그중 골을 더 많이 넣는 팀이 이기는 단순한 경기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기기 위해서는 골의 양이 중요한데, 이를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체력이 있어야 하고, 공을 소유하는 팀워크도 필요하고, 전술을 이해하는 능력 역시 요구된다. 그런데 어느 팀의 전술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정해진 시간 내에 (여러 변수까지 고려하면서) 공을 소유하고, 뺏기면 공을 향해 달려가는 기본적 자세라 볼 수 있다. 유명한 선수가 팀에 있거나 없거나, 그리고 전술이 뛰어난 감독이 있거나 팀 자체로 이미 유명한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기본적인 자세는 수적 우위에 좌우된다. 공을 향해 달려갈 때 사실 혼자 달려가는 것보다 둘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상대방으로 달려가는 게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선수에게 공을 보낼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명에게 둘이서 가면 패스를 차단하고 공을 뺏을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적 우위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궁극적으로 모두가 공격 가담을 하고 수비를 하는 팀이 되는 것인데, 이것이 토털 풋볼의 전술이다. 이 전술은 네 개로 나뉘는 선수들의 포지션, 그러니까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골키퍼 중 필드 플레이어(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를 역할과 위치로 고정하지 않고 서로 바꿔가면서 필드라는 공간 안에서 흐름을 다 같이 만든다. 이때 고정된 포지셔닝, 즉 위치-역할은 사라지면서 모든 선수의 역할이 변경되면서 경기를 이끌어가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례가 1974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요한 크루이프(Johan Cruyff, 1947~2016)라는 유명한 선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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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020년 현재 몇 개 공간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고 공간 대부분이 사라졌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한편으로 그런 흐름과 직접적인 연관 없이, 또 다른 영향을 받으면서 올해도 그리고 지금도 사회는 움직이고 미술계 역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다시 돌이켜볼 때, 신생공간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 공간과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이를 신생공간과 토털 풋볼의 공통점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축구 네덜란드 대표팀은 경기장을 포지션만이 아니라 공간과의 관계로 보고 경기를 이끌었다. 말하자면 특정 역할인 골키퍼를 제외하고 (비록 크루이프는 “골키퍼가 첫 번째 공격수이고 공격수가 첫 번째 수비수”라는 말을 남겼지만) 전체 흐름을 다 같이 이끄는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하였다. ‘특정된 포지션이 없다’, 바꿔 말하면 공격은 최전방, 미드필더는 경기장 중앙, 수비수는 골키퍼 앞과 같은 특정 위치에 따른 역할이 아니라, 경기 진행 흐름에 따라 계속 역할이 전환되는 방식으로 경기가 운영되었다. 신생공간의 동향에 대해 사후적으로 판단을 내릴 때, 필자는 마치 토털 풋볼과 같다고 생각한다. (미술) 공간에 대한 포지셔닝에 특화된 상대 팀에 맞서 임시적 위치와 역할을 ‘전술’ 삼아 시합을 전개했다.
업무 역할이나 권위에 따른 특정 포지션이 아니라 모두가 미술 신의 흐름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신생공간은 특정 공간보다 하나의 흐름을 이끄는 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신생공간이 사실은 부재했다는 판단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팀은 고정 멤버나 동료가 아니라 전술 변화에 따라 영입과 방출, 휴식과 은퇴가 빈번히 발생하므로 유동적인 존재들로 구성된다. 사실상 팀의 근본은 홈 경기장에서 꾸준히 응원해 온 팬과 경영진, 그리고 세련된 엠블럼에 의해 계속 지지된다. 반대로 말하면 팀에 소속되는 멤버들은 일관성이 전혀 없다. 토털 풋볼과 같은 신생공간의 운영 방식은 2017년 이후로 점점 변화되면서 판매 플랫폼을 비롯하여 유통의 문제로 이행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의 변이는 신생공간이 ‘끝났다’라고 하는 지점으로 제시되곤 한다. 전시와 다른 유통에 초점이 놓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공간이 사라진 이유가 클 것이다. 신생공간은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전시 공간이 없어졌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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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간이 없어지고 난 빈 공간 대부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시청각’으로 가지는 못하지만, 대신 시청각이 있던 지리적 위치를 방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운영이 끝났다고 장소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공간은 (지리적 위치와 달리) 점유되는 어떤 시공간을 제공하는 장을 말한다. 일반적인 공간은 물론, 신생공간 역시 건물의 외벽과 임시적인 무대를 비롯한 하드웨어적 속성으로 시공간을 받쳐 주고 관람객에게 관람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 경험을 제공한 공간이 허물어지거나 더이상 접근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전시 공간이 사라졌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대신 우리는 사라진 공간을 시간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지난 축구 경기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관객도 선수도 경기장에 없을뿐더러 경기장 자체가 없다. 그러나 그 경기는 화려하고 재미있었다. 우리 기억은 신의 흐름 속에서 공간이 점유한 시간, 거기서 경험한 내용에 있다.
신생공간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경기에서 패배했다기보다 관객과 선수 모두 경기장을 떠났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지 모른다. 이제 후반전까지 경기는 다 끝났다. 흐름을 같이 만들던 선수들은 다른 팀으로 입단하고 혹은 은퇴했다. 아직 계속 뛰는 선수들 또한 있다. 신생공간 이후, 미술 신에 흐름을 만드는 방식은 토털 풋볼이 아니라 좀 더 각자의 포지션을 기점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그것은 실패의 낙인을 무리하게 찍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이전의 공간과 아예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만 가리킬 뿐이다.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도 등장하고, 아예 그 흐름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도 등장했다. 새로운 플레이어가 꼭 토털 풋볼 전술을 고집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래도 이전에 등장한 그 동향은 기억에 남는 흐름과 공간이었다. 마치 힘있게 응원하던 경기장의 열광을 다시 떠올리는 것처럼 관객들은 그들이 주도하는 흐름을 목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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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등장한 판매 플랫폼의 흐름, 그리고 201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우리가 목격하는 미술 신의 흐름은 과연 무엇일까? 당시 출전한 플레이어를 다른 공간에서 열린 전시에서 보기도 하고, 또 전혀 다른 흐름에서 등장한 플레이어를 보기도 한다. 사실상 플레이어는 활동량의 가시화—곧 전시—와 비가시화 사이에 있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 외에 대기명단과 부상명단에 들어간 사람, 그리고 볼 보이와 관객으로 그 장면을 목격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특정 흐름을 구성해 나가는 것과 달리, 최소한이자 최대 효과를 내는 기획으로 추세가 기울어진 듯하다. 바로 2인전 형식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제 경기장에서 함께 열광하는 것과 좀 다르게, 소규모의 차원에서 연결되고 또 다른 통로로 이어지는 흐름에 진입하게 되었다. 작업의 양은 공간에서 개인전의 절반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에 다른 상대를 둠으로써 비교와 대척의 비평적 관점이 들어선다. 이제는 경기 운영 방식이 토털 풋볼보다 더 미세한 차원으로 아예 전환되었다. 작가와 작가, 그 중간에 기획자나 비평가가 들어가는 포지션 배치는 전시 공간 하나를 기준으로 전개된다. 단순히 공간을 둘로 쪼개서 배분하는 게 아니라 두 작가가 서로 얽히고 섞이는 장으로 등장한다.
이때 서로는 적대적인 관계보다는 대조와 비교뿐만 아니라 상승효과처럼 제시되는데, 어떤 큰 주제와 별도로 2인전은 각자의 작업에 초점을 두어 강조하는 태도로 선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산수문화’에서 2018년에 열린 문주혜와 최하늘의 각각, 그러나 함께 선보여진 전시 《카페 콘탁트호프》, 올해 킵인터치에서 열린 김민수와 임정수의 《해의 바탕》, 합정지구에서 열린 박세진, 부원희의 《내 눈이 가늘어진다》(허호정 기획), 시청각에서 열린 람한과 글로리홀의 《Ghost Shotgun》 등등, 그 형식 자체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2020년으로 진입하는 단계에서 거대한 주제—인류세, 믿음 소망 사랑, 고향 등등—로 포섭되기 이전에, 작품과 기획/협업을 강조하는 태도로 부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열광했던 경기장을 뒤로하고 다른 곳에 비교와 대조를 포함한 공존의 태도로 전시를 모색한다.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전시와 기획을 주도하는 추세에서 대관을 통해 최소한이지만 최대치의 비평적 효과를 창출하는 추세로 이행되는 것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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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공간이 저물어가던 시점, 요한 크루이프는 병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반전을 2-0으로 이기고 있다.” 암과 투쟁 중이던 2016년 2월에 이 말을 남기고 다음 달 그는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그래도 기억하는 것은 그가 2:0 흐름에서 패배한 ‘결론’이 아니라, 그 속에서 빛나는 ‘하이라이트’의 여러 가지이다. 이미 토털 풋볼의 시대는 지났고 열광하던 경기는 기억 속에 머문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흐름이 파생되어 등장하고 있다. 지금은 이론화가 아직 덜 되고 있지만, 필자는 2인전 형식의 흐름을 바로 신생공간에서 파생되어 나온 솔직한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적어도 지금 2020년이 시작된 단계에서 밑줄 긋는—하이라이트를 치게 되는—부분은 그것이다.